[미디어] 도피성 대학원생이 데이터 사이언티스트가 되기까지
대학원을 포기하고 데이터 사이언티스트가 되기로 했다.
feat. 삶의 수단과 목적
[1] 대학원을 포기하고 데이터 사이언티스트가 되기로 했다.
[2] 제 2의 대학교, 부트캠프를 다니다.
이 글은 저의 도피성으로 진학한 문과 대학원생에서 데이터 사이언티스트로 취업하기까지의 진솔한 이야기를 담은 에세이입니다. 저처럼 진로를 고민하거나 커리어 전환을 꿈꾸는 누군가가 이 글을 읽고, 가장 본질적인 것들을 고민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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"안녕하세요 교수님, 저... 이번 석사 전기 합격생 양세비입니다."
"어 그래 세비야, 무슨일이니?"
"죄송하지만...., 이번 학기에 들어가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."
미친 짓을 해버렸다.
3학년 때부터 장장 4편의 논문, 13번에 걸친 공모전을 나가며 학계 탑에 계신 그 교수님의 눈에 들기 위해 아득바득 노력했다. 학점이나 학벌같은 조건도 그닥 좋지 않았기 때문에 더 눈에 불을 키고 입시를 위해 학부생활의 마지막을 갈아 넣었다
그리고 보란듯이 그 결실을 이뤄낸 지 한 달 만에 나는 석사 합격을 포기해 버렸다.
장장 2년을 투자해 얻어낸 성과를 포기하는 건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
그리고 고민이 시작되었다. 도시 계획가가 아닌 나는 누구일까? 이제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?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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4년 간의 대학 생활을 돌아봤을 때, 한 마디로 나를 정의하자면 나는 '방향을 모른 채 열정만 가득한 학생' 이었다.
다시 돌아가서 그렇게 살라 하면 지금은 못 할 정도로. 대학생의 양세비는 치열했다. 예를 들자면 대학교 3학년 때는 21학점을 들으면서 영어 학원에서 중등부 전임 강사로 주 6일을 출근했다. 코로나 사태로 수업이 온라인으로 대체되어 가능했다 또, 일 년 동안 13번의 공모전에 나가고 이를 바탕으로 소논문도 한 편 썼다. 심지어 여기에 모자라 서울에 있는 6개 학교를 돌아다니며 도시 공학 분야에서 유명하신 교수님을 찾아가 수업을 들었다. 더하자면 대학원 수업을 청강 할만큼 나는 열정적인 학생이었다. 이외에도 대외활동, 동아리, 자격증 등 소위 말하는 [스펙]을 위해, 내로라하는 교수님들의 눈에 들기 위해 정말 열심히 달렸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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나는 도망치고 싶었다.
당시 나는 이런 나를 SNS를 통해 열심히 전시했기 때문에 가장 많이 듣는 말은 '세비는 정말 대단해, 내가 아는 사람 중에 제일 열심히 사는 것 같아'같은 것들이었다. 언제나 내 바쁜 일상에 대한 칭찬 혹은 동경을 받았고 나 역시 그때는 그런 시선들에 취해있었다.
역설적이게도, 정작 당시의 나는 내가 진짜 뭘 하고 싶은지, 그 중에서도 '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'에 대해 잘 몰랐다. 내가 만들어낸 살인적인 스케줄 때문에 '이게 내 길이 맞나?'에 대한 작은 의문과 두려움을 스스로가 인지하지 못했던 것이다. 가만히 앉아 그걸 생각해 볼 시간은 없었고, 너무 둔한 나머지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조차 잘 몰랐었다. 그렇게 내 안의 에너지가 서서히 바닥나고 두려움은 점점 커지는 줄도 모르고 마른 걸레를 쥐어 짜내는 것 마냥 2년을 더 살았다.
내 안에서 부족한 확신은 외부에서 찾고자 했다. 결연하게 대학원 입시를 준비하겠다 말하자 그간 어떤 노력을 했는지를 아는 주변 사람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아 '넌 분명 잘 할 거야'라고 말해 주었다.
그렇게 앞만 보고 달려나간 난 보란 듯이 최고의 명성을 자랑하는 랩실에 합격을 따냈다.
그런데, 기분이 이상했다.
'해냈다!'는 기분이 아니라 답답하고 턱 막힌 기분이었다. 장장 2년을 미친듯이 노력한 나에게 주어진 합격 목걸이가 족쇄처럼 느껴졌다.
합격 후 아리송한 그 기분은 한동안 유지됐다.
뭔가 답답한 그 상태로 걱정을 안고 떠난 졸업 여행에서도 속시원하게 풀어내지 못했다. 오히려 한국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던 건 크고 큰 숨막힘이었다. 내가 진짜 원한 삶은 이게 아니라는 생각이 그제서야 들었다.
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골똘히 내가 언제부터 왜 어떤 이유로 도시계획가와 연구원을 꿈꿨는지를 고민해보았다. 안타깝게도 그 시절의 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살았는지 글로 남겨두지 않아서 스무살의 진실 된 나를 꺼내볼 수 없었다. 하지만 돌이켜 보면 가장 큰 이유는 아무래도 두려움이었던 것 같다. 나는 도망치고 싶었다. 쏟아지는 취업의 어려움에 대한 뉴스들, 인터넷에 올라온 푸념글, 장녀로서 부모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아야 한다는 부담감, 실패를 두려워하던 어린 나는 그저 대학원을 졸업하면 취업이 쉽게 잘 되고, 일자리가 많다는 것을 기준으로 내 에너지의 방향성을 결정했다.
그리고 그 길로 고민하지 않고 달렸다. 내가 진짜 그 일을 하고 싶었는지, 또 그 일을 하는 삶을 살고 싶었는지는 생각해 보지 않았다. 이미 잔뜩 투자해 둔 것들을 포기하고 바닥부터 시작할 용기가 없었으니 다른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.
문득 내가 진짜 이걸 좋아하는 게 맞는지 의문이 들며 등골이 서늘해 질 때가 있었다. 하지만 애써 스스로에게 세뇌를 걸었다. 진짜 좋아하는 게 아니라고 인정해 버리면 정말 다른 걸 찾기 시작해야 할 것 같았다. 그 '바닥부터' 가 너무 큰 두려움이었다.
대학원을 포기하고, 데이터 사이언스를 선택하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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배우는 것들을 블로그에 꼭 기록하고 있다.
역설적이게도 대학원 입시를 위해 난 모든 것을 철저히 계획했고 내 입시를 지켜보던 주변 모든 사람들은 나의 합격을 예견했다. 당연했다. 나는 '교수님이 탐내는 학생' 이 되기 위해 교수님이라면 좋아할만한 스펙들을 열심히 쌓았다. 내 포트폴리오를 들고 이 분야에서 가장 유명하신 교수님 세 분과 미팅을 했었는데 교수님들 모두가 놀라시며 내 노력을 인정해주실 만큼 열심히 살았다.
그래서 이상했다. 그렇게 '간절히 바랬다고 착각한' 대학원 입시를 끝내고 한국 최고의 랩실에 들어갔지만 별로 기쁘지 않았다. 오히려 덤덤했다. 돌아보면 난 학문의 열정으로 눈빛이 반짝거린 적은 별로 없었다. 나는 항상 내가 이만큼 했어요! 를 자랑하고 싶어했고 인정받고 싶어했고, 이를 통해 스스로 괜찮은 사람이라는 자존감을 지켜내고 싶어했다.
여행에서 돌아와 입학 전의 2주 그 짧은 시간동안 사실은 내 자아가 이렇게 불안하고 난 사실 겁이 많은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됐다. 나는 아직 경험해보고 싶은 게 많은 사람이었다. 여행을 사랑했으며, 새롭게 사람들에게서 에너지를 얻었다. 그래서 더 여러 분야에서 일해보고 싶었고, 여러 나라에서도 살아보고 싶었다. 그러니 나의 대학 생활은 엉뚱한 방향으로 에너지 발산하고 있었던 셈이었다. 직업을 삶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이뤄야 할 목적으로 생각했던 것이다.
한국에서 석사를 끝내고 연구원이 되어 평생 소소하게 잘 살 수 있는 게 보장된 내 미래는 한없이 답답하게 느껴졌다. 나의 두려움이 내 성장을 제한해버린 것 같았다. 그럼 내가 진정으로 좋아하는 건 뭘까? 일단 적어도 연구원이 되는 것은 아니다. 이제 원하는 '삶'을 위해서는 다른 직업을 선택해야 했다. 그거 하나는 확실했다. 그렇게 며칠을 고민하다 우선 걱정을 내려두고 석사 합격을 포기하게 됐다. 첨언하자면, 방금 윗 문단에서는 '걱정을 내려두고' 라는 대목이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. 이제껏 내 삶에서 내가 항상 회피하는 결정을 내린 가장 큰 이유가 저것이기 때문이다.
만약 지금 이 글을 읽는 당신도 비슷한 진로고민을 하고 있다면, 지금 아래에 보이는 몇 가지 질문을 스스로에게 먼저 던져보길 바란다.
2. 그 일을 위해 열정을 쏟을 수 있을 만큼 그 일을 사랑하는가. 힘이 들더라도 하루 종일 그걸 들여다 볼 수 있겠는가?
3. 그리고 앞선 두 질문에 망설임없이 대답할 수 있을 만큼 스스로에 대해 잘 알고 있는가?
저 세 가지 질문들을 스스로에게 던지며 도시공학 분야의 연구자가 되는 것은 내가 원하는 삶을 살 수도, 그렇다고 정말 좋아하는 공부도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. 고민 끝에 공부를 시작해보기로 한 분야는 '데이터 사이언스'다.
학부 시절 논문을 쓰기 위해 파이썬을 잠깐 배운 적이 있었다. 그때 여러 편의 논문들을 써보면서 논문에서 가장 중요한 건 '내 주장이 설득력이 있는가'라는 걸 알게되었다. 하지만 사회대 출신으로서 통계나 데이터는 당장 배워서 적용하기엔 나에게 너무 높은 벽이었고, 결국 사례 위주나 추상적인 아이디어를 제안하는 작품들을 완성하며 졸업 전까지 이 부분을 깊이 공부해보지 못한 게 아쉬웠다. 또, 데이터 사이언티스트가 된다면 연구원보다는 내가 원하는 삶을 사는데 한 발 더 가까워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. 직장의 이동이 상대적으로 자유로우며, 원한다면 다른 국가나 도시에서 일할 수 있고, 특히 영어를 잘한다는 내 강점을 살릴 수 있었다. 프로젝트를 통해 문제점을 찾고 방향성을 제안하는 과정을 좋아하던 나를 가장 많이 성장시킬 수 있는 최적의 길이지 않을까 생각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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최종 결정을 내리고 가족들에게 이 사실을 말하기 전까지의 일주일은 plan A, plan B, plan C 를 세우느라 날밤을 샜다. 할 게 많아서 잠을 못 잔 적은 있어도, 생각이 너무 많아서 잠을 못 잔 건 처음이었다. 그런데도 마음이 무겁진 않았다. 오히려 원하는 것이 또렷해지니 괜찮아졌다. 목적으로서의 직업이 아니라 수단으로서의 직업을 갖겠다고 마음먹으니 지금껏 그렇게 걱정이 많았던 나 자신은 온데간데 없었다. 이 모든 생각과 결정을 내린 것이 대학원 입학 일주일 전인 2022년 2월이었다. 그 길로 초심자가 데이터 사이언스를 가장 효율적으로 배울 수 있다는 부트캠프를 택했고. (아쉽게도 패스트캠퍼스는 아니다) 동기들과 정신없이 공부하다보니 벌써 계절이 두 번이나 바뀌어 9월이 되었다.
국비지원 부트캠프(K- Digital Training)는 고용노동부에서 운영하는 인재 양성 프로그램인데, 데이터사이언스 외에도 개발자, 마케팅, 블록체인, PM 등 수요가 많은 디지털 직업들에 대해 국가가 생에 단 한번 '학원비 전액지원' 해 주는 거라고 생각하면 된다. 지금 내가 강의를 듣는 학원 외에도 패스트캠퍼스를 포함한 여러 학원에서 3-10개월짜리 커리큘럼을 만들어 기초부터 실무까지 교육하고 있다. 일부는 취업연계 프로그램도 운영하고 있다. 혹시 관심이 있다면 블로그 글을 참고하길 바란다.
부트캠프가 반 쯤 지난 지금 배움의 홍수 속에서 매일매일 동기들과 과제, 시험, 프로젝트, 그리고 취업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. 분명 아주 바쁘고 힘든 삶을 살고 있다. 매일매일 과제를 내야 하며, 매주 시험을 보고 매 달 프로젝트를 제출해야 한다.
그런데 난 지금이 훨씬 더 행복하다. 물론 가끔 배우는 내용이 너무 어렵고 따라가기 벅차거나 억울하고 힘든 일이 생겨 눈물 짓는 일도 있고, 밤새 에러와 끝없이 싸우다 내 갤럭시 워치가 '안정 시 심박수 높음'이란 경고를 보낼 만큼 짜증이 나는 날들도 있지만, 이런 일 쯤이야. 삶의 방향성을 잡은 나는 강해질 수 있었다. 걱정에서 벗어나니 모든 일이 너무 너무 신기하게 잘 풀렸다. 4월에는 공모전에서 대상을 받아 미국에서 하는 공간정보 학회에 전액 지원 조건으로 초청 받게 되었으며, 10월부터는 꿈꾸던 기업에서 엔지니어로 인턴을 시작하기로 했다. 또, 패스트캠퍼스로부터 지금 이 글을 쓸 수 있는 소중한 기회도 얻게 되었다. 아직도 올해 상반기에만 나한테 일어난 이 모든 좋은 일들이 믿기지 않는다. 이렇게 일이 잘 풀릴 줄 과거에 알았더라면 그렇게까지 두려워하고 피하지 않았을텐데 말이다.
그래서 마음가짐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하며 이 글을 끝내고 싶다. 지금도, 심지어 오늘도 나에게 진로고민을 털어놓던 후배에게 해주고 온 말이 있다. 가장 먼저 해야할 것은 네 마음의 무게를 쟤는 것. 또 네가 어떤 사람인지, 어떻게 살고 싶은지를 먼저 알아야 그 다음을 선택할 수 있을 것. 이 말을 자신있게, 또 진심으로 해줄 수 있다는 것조차 돈과 직업을 삶의 목적으로 여기던 나에게는 큰 변화이지 않을까? 수 없이 도전했고, 또 방황하며 실패했지만, 나는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났다.